컴공과를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하는 대학생과의 상담 이야기
발단
몇 주 전 지인(H님)이 오랜만에 연락을 주셨다. 따님(Y님)이 대학교 2학년인데 컴퓨터공학 전공과목을 따라가는 걸 어려워해서, 괜찮은 코딩학원을 추천해줄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Y님은 컴공을 계속 전공으로 가져가야 할지 자체도 고민이라고 하셨다.
그냥 내가 아는 교육 서비스들을 추천해드릴 수도 있었지만, 학원을 가는 것만으로는 따님이 가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H님과 대화를 나누며 컨텍스트를 좀 더 파악하다가 그냥 셋이서 밥을 같이 먹자고 말씀드렸다. Y님이 곧 기말고사라서 12월 23일로 약속을 잡았다.
사전 대화
약속을 잡은 며칠 뒤, 이분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 이 모임을 주제로 AC2의 이상현님께 코칭을 받았다. 상현님과 함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니 나는 Y님과 라포가 하나도 없고, Y님이 어떤 상태인지,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긴 한건지 등등을 하나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 식사하면 왠지 망할 것 같았다. 그 불리함을 타파하기 위해 미리 이메일로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얘기하니, 상현님은 카카오톡 같은 더 가벼운 채널로 접근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하셨다. 듣고보니 확실히 그랬다.
H님을 통해 Y님이 괜찮다면 카톡 연락처를 주실 수 있냐고 여쭤보고, 다행히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 인사하고 대화 나눠보니 Y님이 아주 적극적이었다. 원래 어색할까봐 '시험공부 꿀팁' 같은 걸로 대화를 풀어나가보자는 전략을 상현님과 짰었는데, 그럴 필요가 거의 없었다. 첫 질문부터가
휘동님이 컴퓨터공학이라는 전공과 그 의미가 전공할 당시와 지금까지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해요
였으니.
나는 Y님에게 대학생 때 썼던 글, 작년에 썼던 글 2개를 전달드렸다. 이걸 읽으시면 이제 Y님이 H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아시게 될 거라고도 덧붙였다.
너무 긴 글을 드렸나 싶었지만 Y님이 글을 아주 집중해서 읽었다고 말씀해주셨다. 이후 여러가지 질문을 주셨고, 거기서부터 더 길게 대화를 나눴다. Y님은 어떨 때 즐거운가, 현재 무엇을 어려워하는가 같은 이야기들. 아쉽게도 그날 하루 이후 더 대화를 주고받진 못했지만 적어도 식사 자리에서 만나서 어색하진 않겠다 수준으로 자신감이 올라왔다.
식사 자리
약속한 날이 되어 두 분을 식당에서 만났다. 식사하며 아이스브레이킹을 좀 하는데 H님이 말씀이 좀 많으셨다. 아마 H님 나름대로 어색함을 풀어주려는 시도였을 것 같다. H님께는 죄송했지만 우리는 나중에 따로 회포를 풀고, 지금은 Y님을 위한 자리니까 Y님에 더 집중했으면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렇게 다시 대화가 시작되었다.
우선 오늘 만남 이후에 어떤 변화가 생기길 기대하는지 서로 생각하는 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참동안 대화를 나눴다. 학습과 동기부여와 의사결정에 대한 지식, 기술, 태도, 그리고 내 경험 등. 내 입장에서는 Y님에게 필요하겠다 싶은 이야기였고, 집중해서 듣고 계셨지만 느낌이 좀 쎄했다. 실제로 Y님이 유의미한 행동 변화를 만드실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대략 한 시간쯤 지나 H님은 먼저 일어나시고 Y님과 둘만 남게 됐다. 이때다 싶어 처음 기대한 바랑 비교하면 지금 어느정도나 충족되고 있는지 5점 만점으로 여쭤봤다. Y님이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2점이라고 하셨는데 실망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안심했다. 부정적 평가를 해주실 만큼의 신뢰를 얻었다는 증거로 느꼈고, 내가 느낀 쎄함이 맞았다는 걸 확인했고, 그러면서 조정의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30분 뒤 5점이 되었다면 우리가 뭘 했길래 그렇게 됐을까요?" 라고 다시 물었다. Y님은 본인이 방학동안 어떤 활동을 하면 효과적일지 내가 제안해주는 걸 들어보면 5점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대답을 바로 해줄 수도 있었지만, 그 대신 방학때 할 활동을 각자 적어본 다음 비교해보자고 제안했다. 5점 만점에 2점 받았던 그 시간동안 내가 얘기했던 효과적 학습 전략의 핵심이 '스스로 예측해보고 비교하기'였는데 이걸 실습할 좋은 기회라고 느꼈다.
그런데 핸드폰을 꺼내서 써보려니 바로 부족한 점이 드러났다. 언제까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아야 했다. Y님에게 방학 때 할 그 활동의 목표가 뭔지 물었더니 컴공 전공 공부에 대한 거부감이 없어지고, 기꺼이 하고 싶은 마음이 되고 싶다고 하시더라. 그러면 1월 말까지로 기한을 잡고, 이 목표를 위해 방학때 할 활동을 적어보자고 했다.
10분 정도 초집중해서 타이핑하고 나니 엄지손가락이 아팠다. 나는 대략 이렇게 썼다. (이 글 쓰면서 살짝 보강하고 다듬었다)
그 과목과 다른 전공 과목의 차이가 뭔지 적어본다. 단순히 A 자체의 특징뿐 아니라, 그걸 공부하던 시기의 나 자신과 내 주변 환경은 어땠는지 등을 다 생각해본다.
이번에는 전공과 상관없이, 내가 굉장히 즐겁게 공부했고 빠르게 성장감을 느꼈던 무언가(B)를 떠올려본다. 이건 꼭 과목 단위가 아니라 과목의 한 단원, 한 프로젝트 같은 단위여도 좋다. 학교 과목이 아니라 책이나 운동, 게임 같은 것이어도 좋다.
B도 A처럼 특징을 적어본 뒤, B의 특징 중 A의 특징과의 공통점을 찾는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B의 특징 중 A 공부에 작게 전이할 수 있는 활동을 설계한다.
예를 들어 Y님이 특정한 비전공 과목을 엄청 즐겁게 들었었다고 하셨다. 그 과목은 스스로 연습문제를 만들어 토론하고, 교수님이 토론의 허점을 지적해주는 방식의 교수법이 좋았다고. 그러면 여기 적용된 교수법을 아주 일부분이라도 A에 적용할 방법을 궁리해본다.
여기까지를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친한,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뭘 하든 즐거운 친구와 날잡고 함께 한다. 일종의 개인 방학 프로젝트다. 그리고 이 활동 설계는 지금까지의 모든 맥락을 다 주면서 AI에게 조언을 받고, 휘동에게도 카톡 보내서 조언을 받는다.
조언받기 전에는 예상답변을 미리 적어보고, 답변 받은 거랑 비교하고, 피드백도 받아본다. 조언은 "내가 설계한 이 활동을 재미있게 하려면, 실제로 꾸준히 하려면 어떻게 할까? 내가 점점 더 잘 하고 있다는 걸 확인/측정할 기준이나 방법은 뭘까?" 같은 걸 핵심으로 받는다. 단순하게는 교과서 퀴즈 풀기도 가능할 것이고, 내 맥락에 맞는 퀴즈를 AI에게 만들어달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과정을 SNS나 블로그 등에 기록으로 남긴다. 이거 자체가 나의 학습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포트폴리오다.
Y님은 "친구와 함께 게임 만들기" "백준 문제 100개 풀기" 같은 항목으로 5개쯤 적혀있었다. 그 항목들에 대한 내 의견도 말씀드리고, 내가 쓴 걸 보여드리고 비교하며 얘기 나누다 보니 Y님의 표정이 확 살아나는 게 느껴졌다.
맺으며
헤어지기 전에, 오늘 집에 가서 뭘 해보고 싶은지 여쭤봤더니 '과목 분석하기'를 바로 해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친한 친구랑 함께 음성통화하며 해보는 걸 제안드렸다. 해보신 다음에는 부담 가지지 말고 꼭 내게 연락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아무리 이렇게 얘기해도 실제로 연락하는 주니어는 극히 드물기 때문에, 실제로 연락만 한다면 이미 엄청나게 잘 한 거라고. 집에 돌아가면서는, 질문할 때의 두려움에 대해 썼던 글도 전해드렸다.
나는 진심으로 Y님이 질문과 부탁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성장해서, 언젠가 내가 줬던 도움을 다른 후배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여성 개발자 모임을 비롯한 다양한 커뮤니티의 도움을 받고, 또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Y님의 희망찬 미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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