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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니 생각이고 (feat. 장기하와 얼굴들)

모든 의견은 특정 기간동안 특정 사람의 눈으로 관찰한, 실제 세계의 좁은 단면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단정 알러지

"개발자 특" "소름돋는 ENTP들의 공통점" "찐 부자들의 습관" "한국 중장년층 창업가들의 특징" ...

저는 이런 단정적인 문장, 일반화된 명제에 꽤 심한 알러지가 있습니다. "출처가 어디냐, 누가 어떻게 수집한 데이터냐"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어지는 증상이죠. 글로 볼 때는 나름 잘 참을 수 있는데 말로 들었을 때는 입이 너무나 근질근질해집니다.

이런 글이 유머라면 그나마 웃고 넘길 수 있지만, SNS에서 진지하게 주장하는 컨텐츠를 만나면 저도 좀 진지해집니다. 이 때 저는 통계나 연구 결과 출처가 나와있는지를 먼저 살핍니다. 그런 게 없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말이라도 제게는 신호보다는 소음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신뢰할 수 있고 유효한 정보여야 제 삶에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그런 연구자료 또한 "특정 시점에, 특정한 사람이나 현상을, 특정한 방법으로 수행해서, 특정한 연구자가 해석"한 것임을 명심해야 하지만요.

만약 "내가 만나본" "내가 경험한" 같은 전제조건이 앞에 딸려있으면 알러지 증상이 줄어듭니다. 그런데 거기에 "진짜 고수들의" 같은 말이 붙어있으면 증상이 다시 올라옵니다. 진짜 고수의 기준을 뭘로 잡았는지, 그게 유효한 기준인지 묻고 싶어지거든요.

안타깝게도, 제 알러지랑 상관없이 SNS에서는 이런 단정적인 글이 제법 인기를 끄는 걸로 보입니다. 전제조건이 덜 붙어있는 일반화된 문장일수록 "이거 내 얘기잖아!" 하며 공감하고 '사이다'를 느끼는, 이른바 바넘 효과가 나타나기 쉬워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짧은 시간에 소비할 수 있는 숏폼 컨텐츠가 급부상하고, 글이 길면 '3줄 요약'을 요구하는 흐름과도 무관하지 않을듯합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니 그런 글이 다시 많아지고요. (Disclaimer: 이 문단은 통째로 제 뇌피셜입니다)

즉, 이런 글을 피하고 싶어도 이미 내 주변에는 이런 글이 넘쳐납니다. 그러니 믿을 수 있는 출처로부터 학습하는 습관을 들이는 한편, 이러한 '소음'의 홍수 속에서도 유효한 '신호'를 효과적으로 선별해내는 방법을 훈련하는 게 더 유리한 행동일 수 있습니다.

신호와 소음을 구분하며 나를 지키는 사고법

기본 태도는 '그건 니 생각이고' 입니다. 저는 '기하적 사고'라고도 부릅니다.

"개발자 특: 체크무늬 셔츠만 입음" 같은 말을 들었을 때,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체크무늬 입은 개발자를 많이 만나봤나보다.' 라고 가볍게 넘기는 거죠.

여기에는 시점에 대한 인식도 포함됩니다. 정보의 유효성은 시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모든 의견은 어떠한 창(window), 즉 특정 기간동안 특정 사람의 눈으로 관찰한, 실제 세계의 좁은 단면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집니다. (부정적 피드백에 대처할 때도 같은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만약 흥미가 생기면 '개발 직군 종사자와 패션 센스에 대한 연구' 같은 키워드로 검색해봄으로써 재밌게 학습할 소재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고요.

거꾸로 생각하기: 이건 내 생각이고

'기하적 사고'는 유머 커뮤니티의 아무개가 아닌 유명한 전문가의 말에도, 내가 신뢰하는 사람의 말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성역은 없어요. 오히려 그런 사람의 말일수록 내가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가능성이 커지니 더욱 깨어있어야 합니다. 저는 부모님에게도 이렇게 도전했다가 혼난 적도 있으니, 여기서도 선은 지켜야겠습니다만.

거꾸로 본인이 권위, 권력,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를 성역으로 만들고 있진 않은지 조심해야 합니다. 심지어 "A라는 조건에서 B는 C일 가능성이 있다"라고 했더니 "B는 C래!!!"라고 왜곡될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미칠 노릇이죠. 저는 그럴수록 스스로의 파워를 의도적으로 낮추고, 내가 틀릴 수 있음을 강조하며, 반박 의견과 증거를 반갑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태도를 '역-기하적 사고', ‘이건 내 생각이고', 또는 'Strong View Weakly Held'라고도 칭할 수 있겠네요.

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이 아주 좋은 예입니다. 그는 <종의 기원> 출판 전후로 수많은 반박 의견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본인의 이론을 개선했다고 해요. 찰스 다윈이 당시 동료 과학자들과 나눈 서신에 찰스 다윈의 태도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As far as I can judge, I am not apt to follow blindly the lead of other men. I have steadily endeavoured to keep my mind free so as to give up any hypothesis, however much beloved (and I cannot resist forming one on every subject), as soon as facts are shown to be opposed to it.

Internet Archive, The Life and Letters of Charles Darwin, 99p

본인이 아무리 사랑했던 가설이라도 반박 증거가 나오면 즉시 버렸다니 그야말로 역-기하적 사고의 화신이네요. 저는 이런 다윈의 태도가 존경스럽고, 저도 그처럼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SNS에서도 기하적 사고가 조금이라도 널리 퍼져서, 제 알러지 증상이 완화되길 기원합니다.

추신: 저도 모든 사람의 모든 의견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건 아닙니다. 유머로 소비될 때는 그게 지나치게 편견을 강화하지 않는 한 크게 신경쓰지 않아요. 제가 이미 신뢰하는 사람이 재미있는 정보를 줬을 때는 검증 없이 바로 작게 시도해보기도 합니다. 이 글은 정보 소비자로서 조금 더 냉정하게 (말꼬투리 잡기가 아닌) 유효한 근거를 요구하길, 그럼으로써 정보 생산자들도 조금 더 책임감 있게 근거를 명시해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썼습니다.